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때로는 나 하나만의 이익을 생각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나 사회 전체의 영향을 고민할 때도 있다.
그런 순간마다 떠오르는 기준이 있다면, 바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이다.
이 표현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윤리철학의 한 축을 이루는 공리주의의 핵심 개념이다.
18세기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은 인간의 행동은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보았고,
어떤 선택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선택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가라고 제시했다.
그가 말한 바로 그 기준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이다.
이 개념은 듣기에는 참 그럴듯하다.
사회 정책을 만들 때, 한 사람보다는 수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방안을 선택하는 것.
회사를 운영할 때도, 일부 이익을 위해 전체 직원을 희생시키기보다 모두의 균형 있는 성장을 고려하는 것.
심지어 친구들과 식당을 고를 때조차 “대부분이 좋아하는 곳으로 가자”는 선택도 이 개념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과연 이 기준은 항상 옳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100명의 사람을 웃게 하기 위해 1명을 억울하게 만든다면, 그 선택은 정당한 걸까?
이러한 딜레마는 오래도록 공리주의의 고민거리였다.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소수의 권리’가 무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개념은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여전히 유효한 철학이다.
그 이유는 이 개념이 절대적인 정답이라서가 아니라, 사회를 보다 균형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현실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선택은 없지만,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길을 찾으려는 노력,
그것이 바로 이 원칙이 지닌 가치다.
오늘 당신이 어떤 선택을 앞두고 있다면,
잠시 멈춰서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이 결정이 모두를 위한 방향인가, 아니면 누군가를 외면한 결과는 아닐까?”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더 많은 사람의 미소를 떠올리게 만드는 선택이라면
그건 이미 충분히 좋은 방향일지도 모른다.